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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아카데미/한국현대사 다이제스트 100

하나회 제거와 금융실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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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회숙청

김영삼은 1993년도에 대통령 취임후 신군부의 핵심이었던 하나회를 숙청하기 위해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참모총장을 취임 후 며칠만에 바로 정리하였으며 이후 순차적으로 신군부 쿠테타의 주범이었던 장군들을 차례대로 제거하였다.

하지만 전두환과 그 일당들은 그것이 하나회 전체를 제거하기 위한 작업인지 눈치를 채지 못 했다. 단지 그것은 김영삼 대통령이 군내의 주요 자리에 본인의 인맥라인을 셋팅하는 정도인 줄만 알았다. 김영삼은 취임 후 의도적으로 막강한 하나회의 세력을 두려워 한다는 느낌을 가지게끔 행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김영삼 대통령이 하나회에 대항하다 한직으로 밀려난 장군을 전격적으로 다시 주요 요직으로(특전사령관 이었나?) 발탁하며, 본격적인 하나회제거를 선언하게 되었다.

이때 마침 용산 서빙고 장교 아파트에서 하나회 소속 리스트가 삐라형태로 누군가 유포시켜서 돌았는데 이를 본 비 하나회소속 장교들이  분노했고 하나회 제거 작업은 군내에서 더욱 힘을 받게 되었다.

또한 하나회 출신들을 군 주요 자리에 인사발령 할 수 있었던 하나회 소속 육군본부 인사처부장 등 인사담당자 2명을 제거하여 확실히 하나회 소속 멤버들을 솎아 내어 제거하였다.

전두환은 서울대 학군단 시절 박정희의 군사 쿠테타를 지지하는 데모를 후배들을 동원하여 한 적이 있는데 이를 계기로 박정희의 눈에 들게 되었다. 이후 박정희는 자기를 호위할 젊은 장교 11명을 발탁했는데 이 때 하나회 멤버 10명이 추천받아 발탁되어 청와대 및 경호실 등에서 권력을 거머쥐게 된다.

하나회 소속 군인들은 계급보다 하나회 기수를 더 중요시 여기기도 했는데 바로 이것이 신군부 쿠테타를 일으킨 하극상의 기반이 된 그릇된 문화가 된다.

김영삼은 박정희부터 시작하여 전두환까지 이어진 군부 정권의 군 정치적 개입을 완전히 종식시키고자 했고 신속하게 뿌리까지 하나회를 성공적으로 제거하여 90년대 초 한 국 정치사에서 큰 업적을 남기게 된다.


# 금융실명제

금융실명제 또한 민주화를 위한 과정에서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박정희부터 전두환-노태우까지 이어졌던 군부 정권에서 매우 많은 정치자금이 차명계좌 등으로 지하경제를 만들었다.  결국 깨끗한 선거와 투명한 정치자금을 통한 민주적 직선제 풍토를 만들기 위해선 금융실명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많은 고위공직자들이 차명계좌로 다른 재산을 많이 은닉하고 있었기에 기득권의 반발이 심했다. 그래서 김영삼은 입법을 통한 제도 시행이 아니라 긴급명령을 통해 즉시 금융실명제를 시행하였다.

또한 금융실명제를 시행하기 전에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를 의무화 했으며 이때 많은 공직자들이 신고한 재산이 터무니없이 낮게 나와 은닉재산이 많다는 사실이 공개되게 된다. 금융실명제가 힘을 받게 된 이유다.

김영삼은 금융실명제를 신속하고 조용히 추진하기 위해 극비리에 진행했고 반대했던 경제수석과 국무총리에게는 마지막까지 비밀리에 긴급명령을 전국 생방송으로 시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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