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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아카데미/인문학메모

파트 1. 마케터라면 한 번쯤 고민해봤을 3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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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는 광고쟁이(또는 마케터)를 위한 인문학을 책으로 내기 위해 얕은 수준에서 생각을 일단 남겨 본다.

 

1-1. 이벤트는 개 당 경품 가액을 저렴하게 잡아 당첨자 수를 늘려야 한다 vs 아니다. 초고가 대박 경품을 걸어 화제를 일으켜야 한다.

 

당연히, 가장 먼저 예산에 따라 경품을 기획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결정된다. 이벤트 목적이나 의도, 계절이나 시기적 요소, 주 소비 타겟 등등. 뭐 이런 것들 다 재치고 일단은 예산에 따라 움직이는 법이다. 예산이 의사결정의 거의 전부라고 볼 수도 있다. 이벤트 성격에 따라 역산으로 예산을 수립할 수도 있으나 현실적으로 어렵다. 가용한 자원에서 최대한의 효과를 만들기 위해 플랜-두-씨 하는 것이 마케터가 아닌가?

 

그래서 전제가 필요하다. 자 여기 A라는 이벤트에서 경품으로 배정된 금액이 100만 원이 있다. 그리고 2명의 마케터가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고 있다. 당신은 어느 쪽 의견에 좀 더 마음이 가는가?

 

홍길동 : 일단 이벤트는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의 응모를 받아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나도 당첨될 수 있겠군.." 이라는 기대감을 심어줘야 하지. 그러니 당첨자 수도 많아야 할 거 아냐? 적당히 개 당 1천원 정도 경품을 수백 개 이상 깔아주자고. 그러고 1~20만원 짜리 백화점 상품권 하나 정도로 걸고 셋팅하는게 좋겠어. 그럼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도 나눠 줄 수 있고 그 중 한 두 명은 또 상품권을 받으니 좋잖아? 당첨확률이 높으니까 친구들끼리도 서로 공유하면서 이벤트를 소개해 줄 거라고 

 

임꺽정 : 무슨 소리야. 개 당 1천원 짜리 받아서 누가 좋아하겠어? 그리고 그게 무슨 효용이 있겠어? 괜히 우리 타겟도 아닌 어중이 떠중이들만 몰려 들지. 그런 응모는 의미 없어. 이벤트는 재밌거나 감동을 주거나 둘 중 하나야. 1천원 짜리 경품은 차라리 그냥 사람들이 자기 돈 주고 사고 말겠지. 그리고 요즘처럼 이벤트가 넘쳐 나는 시대에 그냥 스치고 잊어 버리고 만다고. 저렴하더라도 특별한 굿즈가 아니면 의미가 없어. 차라리 1백만원 짜리 초특급 오마카세 식사권이나 초특급 스위트룸 1박 숙박권을 1명에게 주는게 나아. 그럼 어디가서도 자랑이라도 하고 다니겠지. 이벤트도 자발적으로 바이럴 될 걸? 진성 고객을 만들 수 있다고. 이 정도는 돼야 이벤트 페이지도 기깔나게 나오지, 카피 잡기에도 용이하고. 안 그래?

 

다시 말하지만 이벤트 의도나 타겟, 시기 등 다른 요소들은 잠시 내려 놓자.  당신은 누구의 의견에 더 공감이 가는가? 여러명이 당첨되는 것이 이벤트를 성공시킬 확률이 높을 것 같은가? 아니면 확실한 대박 경품을 걸어 주목을 끄는 것이 성공 확률이 높다고 보는가? 둘 다 공감이 가면서도 둘 다 조금씩 꺼려지는 부분이 있지는 않은가? 먼저 여러명을 당첨시켜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경품을 지급하는 것이 이벤트 성공의 총량적 결과에 긍정적일 것이다라고 생각할 법한 양적 공리주의 창시자 제레미 벤덤의 내용을 살펴보자.

 

제레미 벤덤 :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다수의 개인들이 느끼는 쾌락이 사회 전체의 쾌락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행복하다면 그것이 옳은 일이다. 생각해 보라. 사회 구성원 전체를 만족 시킬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면 최대 다수가 행복해지는 것이 사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인 것이다. 18세기 영국 철학자이자 법학자. 현대 민주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 준 미스터 공리주의. 제레미 벤덤. 제레미 벤덤의 공리주의에 입각해서 보자면 이벤트에 응모하는 사람들 중 최대한 많은 인원이 경품 당첨이라는 행복을 느끼는 것이 이벤트 전체의 성과로 연결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니 홍길동의 입장은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얘기한다 할 수 있겠다.

 

※ 벤덤의 공리주의는 전체주의로 연결될 여지가 있다. 역설적이게도 다수의 개개인 행복이 사회 전체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경쟁에서 밀리거나 사회적 약자로 구분되어 결핍이 생기는 계층이 있더라도 대다수의 시민이 행복하다면 상대적 취약계층인 소수 의견은 버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소수의 의견이 전개되지 못 하는 전체주의로 내용이 연결 될 수 있다. 공리주의가 파시즘이라는 얘기가 여기서 나온다. 19세기 후반 미뇨네트호에서 발생한 식인을 통해 목숨을 연명한 사건은 유명하다. 하지만 벤덤의 공리주의는 개인의 행복을 기반으로 공동체 행복의 조화를 중요시 하기 때문에 파시즘으로 연결되는 흐름은 있으나 본질적으로 의미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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