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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아카데미/인문학메모

니체와 기독교, 종교,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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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불린다. 왜냐면 기독교가 지배했었던 세계관을 과감하게 깨부셔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근대를 무너트리고 현대를 열었던 니체의 사상과 그의 세계관을 나는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하는 바이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인간은 자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왜냐면 인간은 그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나 인간의 본래 쓰임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며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본다. 인간은 에덴동산 선악과를 기원으로 모두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기에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구원받기 위한 존재이다. 인간은 구원 받기 위해 하나님과 가깝게 지내야하고  삶에서 늘 기도하는 자세를 가지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해야 한다. 기독교는 인간은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면 안 된다고 한다. 말했듯이 인간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고 모든 것에 대하여 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물어가며 하나님을 찾아 나가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중심 사상이다. 이렇듯 기독교적 인간은 자기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늘 교만하지 말아야 하며 자기반성적이고 양보하며 겸손하고 인내하는 그런 태도로 삶을 살아가야 한다.  

바로 이런 전통적인 기독교적 삶의 태도를 니체는 처절하게 깨부신다. 니체는 기독교가 세계를 병들게 하고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인간은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 나가야 하며 문제해결에 대한 능력을 스스로 가질 줄 알고 진취적이고 미래적이며 굴하지 말고 도전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얘기했다. 이게 바로 주인의 도덕이다.

니체는 도덕을 둘로 구분했다. 노예의 도덕과 주인의 도덕이다. 노예의 도덕은 착한 것이고 수동적이며 또 겸손하고 연민이나 동정,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보았다. 반면, 주인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개인의 성취를 미덕으로 여기며 강하고 창의적이고 용기있는 것을 미덕으로 보았다. 니체는 주인의 도덕을 강조했다. 이러한 주인의 도덕을 펼치기 위해 자기의 삶을 그대로 수용하고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가치전환 할 수 있는 운명론을 또 얘기했는데 바로 이것이 자기의 운명을 사랑해라는 아모르파티이다. 니체에게 인간은 생동감있고 창의적인 존재이다. 개개인의 가치와 욕망을 표현하고 최고의 자아를 추구하는 것의 긍정적 인간신조를 얘기했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시간적으로 존재했던 흔적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무언갈 만들고 창조했던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이고 집단적이며 정치적이다. 인간은 복합적으로 판단하는 이성이 있다. 인간의 이성은 AI가 판치는 21세기 현대사회에 와서 발달한 것이 아니다. 기원전 인류도 이미 지금의 수준으로 발달한 이성을 가지고 있었다. 지성인의 표본이라 불리우는 소크라테스가 기원전 400년도 더 전에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2천년 전의 한 문장으로 부터 우리는 아직도 많은 가르침을 받고 있지 않나?

인간은 종교를 지적으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외부의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사유를 통해 여러 경험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철저히 자기 중심적으로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이유는 이미 우리가 문명과 역사의 경제체제 발전으로 입증하고 경험해 왔다. 공산주의는 실패한 경제체제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세계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이 체제를 도입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의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자유 거래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조절된다고 아담스미스가 기독교적인 가치관에서 또 다른 해방구를 제시해 준 덕분 아닌가?

허나 그렇다고 종교 자체가 악이라는 것은 아니다. 종교는 나약한 인간들의 정신적 해방구를 거의 유일하게 영속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로 인해 위로 받는 많은 사람들의 정신적 해방감을 생각해 보면 이는 실로 인류 전체에겐 엄청난 이익이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측면에서 종교를 대체할 것은 없을 것이다. 물론 종교가 가져오는 반대급부의 수많은 차별과 혐오, 테러와 전쟁으로 인한 피해도 이루 말 할 수 없이 큰 해악이긴 하다. 만약 인간 전체가 아예 종교를 가질 수 없다고 가정한다면 모를까 인간이 종교를 가짐으로써 생기는 해악도 분명히 있지만 그 보다 더 큰 이익이 전체로는 있다고 본다. 종교는 인류애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믿고싶고 그래야만 한다.

인간 개개인은 힘들게도 먹고사는 문제를 매일 마주하고 있지만 인간 전체로 보면 우리는 화성에 탐사선을 보내고 제임스웹 망원경으로 수백광년 떨어진 행성의 수분 함량을 측정하는 빛나는 기술 발전 시대에 살고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아담스미스가 경제체제로 해방시키고 니체가 현생의 자아주의 실천으로 종교적 억압을 해방시키고 나서 인간의 지적 탐구활동과 호기심은 문명 발전의 원천이 되었다.

약육강식의 시대에서 생존하기 위해 살아남아야 했던 먼 옛날 인류의 선조적 시대가 아니고 적어도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고 발전 시켜왔던 시대에 태어나는 인간은 선천적이고 보편적으로 인류애를 가지고 있었다. 식인문화를 가지고 있던 고대 아즈텍 문화에서도 부족간 전쟁을 통해 식인을 했지 배가 고프다고 해서 자기 가족을 먹진 않았다. 단순히 먹고 안먹고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식을 놓으면 보호본능이 발동되며 또 본능적으로 자식은 부모를 좋아하기 마련이다. 성장과정에서 후천적으로 자아가 만들어져 나갈 뿐, 인간 최초의 시작하는 자아는 맹자의 성선설이 맞을 것이다. 성악설이 맞았다면 인간은 현재의 문명을 만들지 못 했을 것이고 성무선악설이 맞았다면 인간은 점차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인간은 화성으로 이주 탐사까지 보낼 계획을 가지고 있다. 초전도체로 문명의 양자적 도약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인간의 발전은 당분간 끝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인간은 종교를 도구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종교도 공히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천국 아니면 지옥. 다른 것이 아닌 틀린 것. 너는 틀렸고 나는 맞는 것. 종교는 선택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종교인의 입징에서는 이분법적으로 대화가 진행 될 수 밖에 없지만 마땅히 종교는 인류의 모든 사상을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종교가 이분법을 버리고 인간의 모든 것을 포용하지 못 한다면 인간은 종교를 도구로 받아들이고 개개인은 종교를 지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럴리 없겠지만 신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해 내기 전까지 인간은 기본적으로 니체의 사상을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 삶의 주도권을 스스로 가지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 자세를 중심으로 종교를 지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 인간 전체는 더욱 공동체적이고 평화롭게 번영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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