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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니타스

한국의 역사,문화 그리고 한국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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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차시: 한국인의 식생활

  1. 한국인의 식사법
    • 한국에서는 식사를 매우 중요한 일로 여겨왔으며, 인사말로도 "진지 잡수셨습니까?"라고 할 만큼 식사가 큰 의미를 가집니다. 전통적인 식사법에서는 어른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큰 예의로 여겨졌고, 음식 앞에서 절제와 정중함이 요구되었습니다.
    • 식사 중에는 음식을 너무 크게 떠서 입에 넣지 말아야 하며, 식사 중에 소리를 내거나 음식물을 흘리는 행동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겨졌습니다. 예를 들어, 국수나 국을 먹을 때 후루룩 소리를 내지 않도록 하고, 물을 마실 때도 조용히 마셔야 한다는 규범이 있었습니다.
    • 또한, 음식을 다 먹은 후에는 그릇에 물을 부어 마지막 한 톨의 쌀까지도 남기지 않고 먹는 것이 미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는 음식을 소중히 여기는 한국인의 가치관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2. 과식하는 한국인
    • 역사적으로 한국인은 대식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식기 크기가 매우 컸으며, 성인 남성은 한 끼에 7홉(약 6공기)의 밥을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식 습관은 여러 문헌에서 언급되며, 한국인이 많이 먹는 이유에 대해 기록된 내용도 다수 존재합니다.
    • 한국인은 풍년이 들면 음식을 아끼지 않고 마음껏 먹었으며, 이는 중국이나 일본의 식사량과 비교할 때 매우 많은 양이었습니다. 홍대용과 김세렴 같은 학자들은 중국인과 일본인의 식사량을 보고 적게 먹는 것에 대해 신기해했습니다.
    • 이러한 과식 습관은 당시의 농업 생산량과 관련이 있으며, 다량의 식사를 통해 에너지를 보충해야 했던 농업 사회의 특성을 반영합니다. 또한, 군사들의 행렬에서 군량의 짐이 반이 넘는다는 기록도 있으며, 이는 한국인의 과식을 잘 나타내는 예시입니다.
  3. 전통 요리법
    • 한국의 전통 요리법은 주로 한글로 기록되어 전해졌으며,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음식디미방'입니다. 이 책은 17세기 안동의 장씨가 집필한 것으로, 동아시아에서 여성이 쓴 최초의 요리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음식디미방'에는 국수와 만두 종류 15종, 고기와 생선류 46종, 채소와 과일 31종, 주류 53종 등 총 146가지의 요리법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요리법들은 세대를 거쳐 전해져 내려오며, 현대 한국 요리의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 또한, 박지원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손수 만든 고추장의 맛을 평가해 달라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는 전통 요리법이 가정에서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전통 요리법은 가족 간의 유대와 음식 문화의 전통을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9차시: 한국의 의복

  1.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옷
    •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의복은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당시의 옷은 단순히 신체를 보호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지배층의 의복은 신분과 위엄을 과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했고, 피지배층의 의복은 노동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발달했습니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미의식과 생활 방식에 따라 옷의 형태와 재질이 달라졌습니다.
    • 삼국시대에는 바지와 저고리가 기본적인 의복이었으며, 여성들은 긴 치마를 입고, 귀족 여성들은 치맛자락을 옆에 끼고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영향으로 의복에 변화가 생기고, 면의 도입으로 인해 무명이 중요한 옷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면은 주로 일상복과 작업복으로 사용되었으며, 서민층의 겨울나기에 큰 도움을 준 누비옷과 솜이불 등이 등장했습니다.
  2. 몽골의 영향과 면의 도입
    • 고려 중기 이후 몽골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의복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몽골풍의 의복이 등장하면서 변발, 조바위, 족두리 등의 헤어 및 소품이 유행하였고,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고, 띠 대신 매듭 단추를 사용하거나 동정을 달기 시작했습니다.
    • 몽골의 영향을 받아 문익점이 면화를 도입하면서 면이 재배되기 시작했고, 무명이 일상복과 작업복에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의생활의 큰 변혁을 가져왔으며, 면화의 도입으로 서민들의 생활이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겨울철에는 솜을 넣은 누비옷이 서민들의 필수품이 되었고, 솜이불과 솜요 등의 생활용품도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3. 조선시대의 옷
    • 조선시대에는 양반의 의복이 매우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양반들은 집안에서도 여름철에 저고리, 두루마기, 창옷 등을 입고 관을 쓸 만큼 의관을 중시했습니다. 외출 시에는 중치막과 도포를 추가로 입어야 했으며, 이러한 복장은 주자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옷이라는 의미에서 도포라 불렸습니다.
    • 서민과 천민의 의복에도 엄격한 규제가 있었으며, 예를 들어 서민은 황색, 자색, 홍색 옷과 삼회장저고리를 입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치마를 입을 때는 무늬 없는 치마를 입어야 했고, 치마를 걷어 올려 허리띠를 매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치마가 부풀려지고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며 의복의 간소화가 진행되었습니다.
    • 기녀의 옷차림은 짧은 저고리와 풍성한 치마 등으로 여성의 옷차림을 선도했으며, 기예를 발휘하는 중에 성매매가 생겨나면서 기녀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발생했습니다. 조선 중기부터 결혼 제도가 친영제로 변화하면서 여성의 지위가 하락하고, 아들을 낳는 것이 여성의 자부심으로 여겨지면서 여성의 가슴 노출이 일반화되었습니다.

10차시: 한국 가옥의 변천

  1. 전통 가옥의 구조
    • 한국의 전통 가옥은 대개 남향집으로 지어졌으며, 사랑채와 안채가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사랑채는 남성의 공간으로, 외부 손님을 맞이하거나 남성들이 모여서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반면, 안채는 여성의 공간으로, 가정 내의 생활이 주로 이루어지는 곳이었으며, 외부 남성의 출입이 제한되었습니다.
    • 가옥 구조는 남녀유별의 원칙을 철저히 반영하여, 남성과 여성의 공간이 명확하게 구분되었습니다. 이는 유교적 가치관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로, 가정 내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전통 가옥에서는 안채와 사랑채를 중심으로 한 중정(중앙 마당)이 배치되었으며, 이러한 구조는 가족 간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2. 조선 후기 가옥 구조의 변화
    • 조선 후기로 오면서 가옥 구조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특히 서울 지역에서는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ㄱ자형, ㄷ자형, ㅁ자형의 가옥 구조가 발달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제한된 공간 내에서 최대한의 효율성을 추구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 ㄱ자형 가옥은 좁은 대지에 적합한 형태로, 건물의 한 면을 마당에 맞춰 배치함으로써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ㄷ자형 가옥은 두 개의 건물이 마당을 감싸는 형태로, 공간의 활용도를 높였습니다. ㅁ자형 가옥은 사방이 막힌 형태로, 사생활 보호와 내부 공간의 통풍을 고려한 구조였습니다.
    • 이러한 가옥 구조의 변화는 당시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반영한 결과로, 도시화와 인구 증가에 따른 주거 환경의 변화를 잘 보여줍니다.

11차시: 한국의 가족 제도와 혼례

  1. 조선시대의 혼례
    • 조선시대의 혼례는 매우 엄격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혼례는 가문의 명예와 관련된 중요한 행사로 여겨졌으며, 혼례 절차의 하나하나가 예법에 맞게 진행되어야 했습니다. 혼례는 남녀의 결합을 넘어 가문 간의 결합으로 여겨졌으며, 이를 통해 가문의 번영과 안정을 도모했습니다.
    • 조선시대의 혼례는 대개 부모의 주선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남성은 신부를 데려와 자신의 집에서 예식을 올리고, 신부는 시댁에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친영제라 불리는 제도로, 이전의 처가살이와는 다른 형태였습니다. 친영제는 여성의 지위를 하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아들을 낳는 것이 여성의 유일한 자부심으로 여겨졌습니다.
  2. 상례와 제사
    • 조선시대의 상례는 사자의 혼을 불러들이는 고복 의식으로 시작됩니다. 고복은 상여가 떠난 후 그 뒤를 따라가며 사자의 혼을 불러오는 의식으로, 이를 통해 사자가 무사히 저승에 도착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습니다. 고복 후에는 염과 입관 과정이 이어지며, 사자의 몸을 정성스럽게 다루어 관에 넣습니다.
    • 입관 후에는 여러 차례의 제사가 이어졌습니다. 제사는 사자의 혼을 기리며 후손들이 사자의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는 의식으로, 조선시대의 중요한 가풍 중 하나였습니다. 제사는 가문의 전통과 유교적 가치를 반영한 것으로, 가문의 결속을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2차시: 노동자의 생활

  1. 노동자의 거주 환경
    •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매우 열악한 거주 환경에서 생활했습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공장 근처의 숙소에서 생활했으며, 이러한 숙소는 위생 상태가 좋지 않고, 공간이 협소하여 여러 명이 한 방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은 노동자들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쳤으며, 생활의 질을 크게 떨어뜨렸습니다.
    •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을 강요받았으며, 주로 12시간 이상의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들의 건강을 해쳤으며, 심각한 피로와 스트레스를 유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러한 환경을 견뎌야 했습니다.
    • 관리자들의 횡포도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관리자들은 노동자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으며, 불합리한 작업 지시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횡포에 맞서기 위해 서로를 위로하고 지지하며, 동료애와 가족애를 형성했습니다.
  2. 노동 환경
    • 노동 환경은 매우 열악했으며, 노동자들은 시간 통제와 도급제 등의 방식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장시간 노동을 하도록 유도되었습니다. 시간 통제는 노동자들의 작업 속도를 강제적으로 조절하는 방식으로, 관리자들이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최대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도급제는 일정한 작업량을 미리 정해두고, 이를 완료하면 임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노동자들은 더 많은 임금을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더 많은 작업량을 소화하려 노력했습니다.
    • 이러한 노동 환경 속에서도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동료애와 가족애가 형성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서로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도우며, 함께 힘든 환경을 극복하려 했습니다. 이는 노동자들이 가족과도 같은 유대감을 형성하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유대감은 노동자들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3. 삼성의 역사
    1. 창립과 초기 성장
      • 삼성은 1936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이병철이 설립한 협동정미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병철은 마산에서 사업을 시작했으며, 이 사업이 삼성의 기원입니다. 해방 후 서울에 진출하여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등 다양한 사업으로 확장했습니다.
      • 한국전쟁과 이후의 경제적 원조를 바탕으로 삼성은 수입 대체 가공업을 통해 자본을 축적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삼성물산공사가 설립되어 본격적인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2. 박정희 정부와의 관계
      • 박정희 정권 하에서 삼성은 국가 경제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삼성은 전경련의 전신인 한국경제인협회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직을 맡아 경제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 이병철은 부정축재의 대표적 기업가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경제 발전 과정에서 삼성이 차지한 비중은 매우 컸습니다. 삼성은 이후 전자, 금융, 화학 등 다양한 산업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현재의 삼성그룹으로 성장했습니다.
    LG의 역사
    1. 창립과 초기 사업
      • LG는 경남 진양의 엄격한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구인회가 설립한 포목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조선흥업회사를 설립했으나 실패하고, 제조업으로 전환하여 1947년 한국 최초의 화장품 회사인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했습니다.
      • 락희화학공업사의 대표 제품인 럭키크림은 당시 독점 제품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통해 상당한 자본을 축적하게 됩니다.
    2. 사업 확장과 현대화
      • 럭키크림의 성공을 바탕으로 LG는 플라스틱 사업에 진출하게 됩니다. 크림 용기의 뚜껑을 만들기 위해 시작된 플라스틱 사업은 이후 빗, 비누갑, 칫솔, 치약 등의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 LG는 이후 럭키와 금성사라는 브랜드로 확장되었으며, 전자 제품, 화학, 에너지 등 다양한 산업에 진출하며 오늘날의 LG그룹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13차시: 전통 놀이와 여가

  1. 윷놀이
    • 윷놀이는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놀이로, 주로 설날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에 가족과 이웃들이 모여 즐기는 놀이입니다. 윷놀이는 인도의 파치시와 유사한 규칙을 가지고 있으며, 네 개의 윷가락을 던져 나온 결과에 따라 말을 움직여 목적지에 도달하는 게임입니다. 윷놀이의 규칙은 비교적 간단하지만, 전략적 요소도 포함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놀이입니다.
    • 한국에서 새롭게 생긴 규칙으로는 '빽도'와 '맞춤나기' 등이 있습니다. 빽도는 윷을 던져 나온 결과가 하나 뒤로 가는 것이며, 맞춤나기는 특정한 조건을 만족시키면 승리하는 규칙입니다. 이러한 규칙들은 윷놀이를 더욱 재미있고 흥미롭게 만들며, 가족 간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 윷놀이는 단순한 놀이를 넘어 가족과 이웃 간의 유대감을 강화하고, 공동체의 결속력을 높이는 역할을 했습니다. 명절 동안 윷놀이를 통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통 놀이의 중요성은 현대에도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2. 장기
    • 장기는 한국의 전통 보드 게임으로, 주로 어른들이 즐기는 놀이입니다. 장기는 두 명의 플레이어가 각각의 말을 움직여 상대방의 왕을 잡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게임으로, 중국의 장기와 유사합니다. 장기는 전략적인 사고가 요구되며, 각 말의 움직임과 역할을 잘 이해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 장기는 주로 겨울철에 가족과 이웃들이 모여 즐기는 놀이로, 가족 간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장기를 두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가족 간의 유대감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전통 놀이들은 현대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으며, 전통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 윷놀이와 장기 외에도 다양한 전통 놀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놀이들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유대와 결속을 강화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재확인하는 기회로 작용했습니다. 전통 놀이들은 한국의 문화와 역사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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