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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강.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미학. 예술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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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아리스토텔레스다... 생물나이는 BC 384~322

 

아리스토텔레스는(이하 아토스)는 의사집안 아들로 태어났다. 17세에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다. 아토스는 플라톤 사망 후 아테네에 학교를 세웠는데 걸어다니면서 대화로 수업을 했다고 하며 훗날 소요학파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게 된다. 아토스는 생에 약 4백권에 달하는 책을 썼는데 상당수는 없어져버렸다. 그는 수학부터 의학 천문학 생물학 지질학 등등 모든 학문 분야의 기초를 다졌기 때문에 만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아토스는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이데아를 부정했고 이데아의 이상세계와 현실의 현상계를 구분짓는 이원론을 거부했다. 그는 현실세계만 존재한다고 해서 일원론을 주장했지만 개별 사물이 재료(질료)와 원리(형상)로 구분된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플라톤적이므로 그의 세계관을 이원론적 일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이건 글의 제일 끝에 후술한다~). 예술에 있어서는 플라톤과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했다. 

 

존재론

아토스의 존재론은 우시아(ousia) 즉, 실체에 대한 연구다. 그리스어 ousia는 있다를 의미하는 동사 einai에서 파생된 말이다. 플라톤은 실체를 보편자, 이데아로 보았지만 아토스에게 있어서 실체는 개체들이다. 즉 개별 사물은 모두 실체(substance)와 속성(attribute)으로 되어 있다고 보았다. 실체는 가장 우선적으로 있는 것이고 다른 것들은 그런 실체에 의존해서 존재한다. 예컨대 휴대폰은 개별자다. 휴대폰은 여러 속성이 있다. 검정색이고 딱딱하고 네모이며 딱딱하다. 겉면은 유리로 덮여있고 버튼들도 측면에 달려있다. 이런 속성들은 우리의 감각으로 알 수 있다. 이런 속성들은 어떤 터 위에서 존재한다. 속성들이 위치할 수 있는 터가 실체이다. 즉 속성이란 실체가 있어야만 존재가능한 의존존재지만 실체는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자존존재이다. (왜냐, 휴대폰의 형상과 기능 및 기타 감각정보로 알 수 있는 속성들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과거 피처폰을 보면 물리버튼이 빽빽했고 덮개가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 스마트폰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렇게 속성은 실체 위에서 언제든 바뀌기 마련이다)

 그리고 아토스는 실체도 2개로 분류하였다. 주어인 개별자가 제 1실체, 주어의 술어가 되는종과 류같은 보편자가 제 2실체이다. 다시 또 예를들자면 이 칠판은 희다라는 얘기에서. 여기서 제 1실체는 칠판이고 2실체는 희다이며 동시에 속성이 된다. 제 1실체는 개체적 속성들의 바탕이고 제 2실체는 본질적 형상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문장에서는 개개인 인간은 제 1실체이지만 인간이라는 보편자는 제 2실체이다. 즉, 개별자를 제 1실체로, 보편자를 제 2실체로 생각한 것이다. 여기 제 2실체인 본질적 형상들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에 해당한다. (기억이 가물하다.. 정리하다 보니 헷갈린다 ㅠㅠ)   아무튼 이상의 얘길 그냥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보편은 개체로 인해 가능하다는 주장으로 플라톤과 정 반대된다는 얘기다. 즉, 보편자 < 개별자란 얘기.  제 1실체가 없다면 제 2실체는 의미가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나를 포함한 인간들이 현상계에서 모두 사라진다면 인간이라는 제 2실체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은 모든 인간들이 사라져도 인간이라는 제 2실체가 이데아의 세계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영혼의 경우도 플라톤에 의하면 영혼은 영혼은 육체와 무관한 것으로 불변하는 실체다. 반면 아토스에게 있어 영혼은 개체과 완전히 소멸되면 함께 소멸한다. 

 

단어 정리

실재(reaity) : 실재는 현실에 존재하는 것. 물질적이고 공간을 점유하는 것으로 실재는 실체와 분명히 구별된다. 실체는 다른 것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체란 변함없이 존재하는 관념적인 것이다. 근대에 와서는 데카르트에 의해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된다. 실재는 관념과 반대라는 얘기다. 

형상(form) : 형상이란 사물의 본질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시각적 주지주의) 사물의 잠재적 원리인 질료와 구별되는 개념이다. 즉 형태란 얘기다. 

본질(essence) : 본질이란 그것이 그것으로 있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고유한 성질이다. 그것이 다른것이 되지 않고 그것으로 계속 있게 만들어줌으로써 동일성이 핵심이다. 예를 들어 본질이란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답에서 '무엇'에 해당한다. 현대의 실존(existence)과 반대된다. 고대 철학에서 본질은 형상(Idea, eidos)와 같은 의미이다. 플라톤은 절대적 진리 이데아를 추구했기 때문에 실시간 계속 변화하고 있는 현재 존재(현존, 실존)는 모두 허상으로 보았다. 본질만 진짜 있는 것, 실체라고 간주한 것이다. 바로 이 이데아가 후대에 기독교 세계관의 토대가 된 것이다. 

 

 

질료형상설

실체는 아토스 존재론의 중심 개념이다. 아까의 설명과 같이 실체는 제 1실체와 제 2실체로 나눈다. 형이상학에서 아토스는 제 1실체가 형상과 질료의 결합으로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일차적으로는 개체들이 실체지만 개체들을 다시 분석해 보면 거기에서 질료적인 측면과 형상적인 측면을 구분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질료는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이고 형상은 배열법칙이나 원리 혹은 본질이다. 개별 사물 속에서 이 두 요소는 불가분리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형상의 지위를 플라톤과는 다르게 봤음을 알 수 있다. 형상을 추상적이지만 초월적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에어컨은 철판이라는 재료와 냉각이란 원리, 이 2가지에 의해서 비로소 개별 사물인 에어컨이 된다. 모든 철판이 에어컨일 수 없고 냉각이라는 원리 자체가 에어컨일 수 없으며 냉각이란 원리가 철판에 작용될 때 에어컨이 되는 것이다.

 아토스는 플라톤처럼 질료와 형상이 분리되어 있다가 만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토스는 개별자가 처음부터 질료와 형상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은 초월적인 것으로 보는 것을 아토스는 실제적인 것을 더 중요시 한다. 아토스는 형상은 반드시 질료와 공존 상태에 있어야만 실체가 될 수 있다. 질료는 형상과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고 형상은 질료를 질료는 형상을 서로 반드시 수반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때 형상이 질료보다 더 우월한 지위를 부여받는다. 개별자가 특정한 종류의 개체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형상 덕분이기 때문이다. 형상은 특정 개별자를 일정한 종의 구성원으로 만든다. 질료는 인식되거나 분명하게 구정될 수 없는 가능성에 불과하기 때문에 형상보다 가치적으로 열등한 것이 된다. 질료보다 형상이 우월한 것이 된 것은 질료에 형상이 개입되었음을 의미한다. 인식론을 존재론과 결합함으로써 질료보다는 형상을 더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존재의 차원에서는 제 1실체가 제 2실체보다 먼저다. 존재를 인식함에 있어서는 형상이 질료보다 먼저다)

 아토스에게 있어 형상은 보편자이며 질료보다 우월하지만 그것이 이데아처럼 초월적인 것은 아니고 현실 개개의 사물에서 추상되는 것이며 개별 사물에 내재해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저 개념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초월성을 부정한다. 아토스에게 있어 보편이란 플라톤처럼 초 감성계에서 연역적으로 주어지는 관념적 실체가 아니라 현실의 개별적 사태들에서 귀납적으로 성립되는 개념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형상은 초월적 세계로 이데아에서 따로 존재한다. 인간은 상기에 의해 형상을 떠올릴 수 있다(연역) -> 바로 이게 망각의 강 레떼의 강을 건너는 것이다.. 상기설. 원래 인간은 알고 있던 것을 그저 다시 기억해 내는 것 뿐이라는 상기설.. 뭐 아무튼 그런반면 아토스에게 있어 형상은 현실 세계에 개별자(질료)와 함께 존재한다. 인간은 경험에 의해 형상을 추출해낸다(귀납). 

 

 

가능태(질료)와 현실태(형상)

아토스는 질료와 형상을 가능태와 현실태라는 동태론적인 관계로도 해석한다. 가능태란 어떤 형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어떤 가능적 힘 내지는 원리이고 현실태란 그 가능태에 비로소 형상이 실현되어진 어떤 상태이다. 즉 꽃씨는 반드시 꽃이 되고 달걀은 반드시 닭이 된다. 그래서 가능태는 언젠가 현실태가 된다. 변화, 생성하는 것은 모두 어떤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 현실태가 그 목적이 된다. 가능태의 최종 목적은 형상이 완전히 실현된 상태인 완전 현실태이다. 형상실현이 진행 상태에 있는 것이 현실태요. 그것이 완료되어 형상이 현현되고 있는 것이 완전 현실태이다. 완전 현실태란 어떤 사물이 가지고 있는 최종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가능태가 완전 현실태를 향해 나가는 이행 과정이 바로 운동이다. 아토스는 이 운동, 변화의 동력을 외부가 아니라 질료 자체에서 찾았다. 꽃씨가 꽃이 되는 힘은 꽃씨 내부에 있지 외부의 타자에 의해 부과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아토스는 플라톤과 달리 내재의 철학임이 드러난다. 

 여기 책상이 있을 때, 책상의 질료는 나무고 형상은 책상이고 작용은 목수이고 목적은 독서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가능태는 질료이고 현실태는 형상인 것이며 현실태를 이우려는 가능태의 목적이 목적인이요 그 목적의 이행 과정이 운동인 것이다. 아토스는 가능태보다 현실태를 더 우월한 것으로 본다. 본질인 형상이 현재 구현되어 있는 상태를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가능태보다 더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본질(보편)이 구체화 되지 않으면, 현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훗날 일어날 유명론과 영국의 경험론의 싹이 보인다. 헤겔에게 영향을 준 대목이기도 하다 (헤겔의 정신은 뼈다..) 아토스의 주장대로 하면 강아지는 가능태고 개는 현실태이다. 가능태는 현실태의 하위 개념이다. 근데 여기서 기가막힌 것은 이것을 무한대로 발전 시키면 궁극에서는 결국 이데아로 연결되는 부분이 생긴다. 결국 아토스는 플라톤을 벗어나지 못 하는 소름돋는 부분이 나온다...  실체는 질료+형상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실체에 또 다시 질료가 더해지고 형상이 더해지고 이게 계속 반복되면,, 예를 들어 흙에 질료를 더하면 시멘트가 된다. 시멘트에 질료를 더하면 벽돌이 된다. 벽돌에 질료를 더하면 건물이 된다. 건물에 질료를 더하면 도시가 된다. 도시에 질료를 더하면 국가가 된다. 국가에 질료를 더하면 지구촌이 된다. 즉, 질료에 가능태를 연속적으로 더할 때 상위개념으로 발전하게 되며 순수질료인 처음 단계가 순수형상인 끝의 단계로 가게 되면 종국에는 이데아로 연결될 수 있게 된다... (플라톤의 미친 이데아론...)

 

자투리...

존재의 차원에선 제 1실체가 (질료) 제 2실체 (형상) 보다 우선하지만 인식의 차원에선 제 2실체가 (형상) 제 1실체 (질료)보다 우선한다..

 

 

무려 한 달 전에 들은 수업이라 교재를 보면서 정리를 해도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있다. 수업들을 땐 이해가 가지만 항상 뒤돌아서면 기억이 잘 안남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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