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아카데미/미학, 철학사와 함께

14강.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미학. 예술론2

반응형

부동의 원동자 (不動의 原動子, kinou akineton)

 

13강에서 말했듯이 아토스는 실체는 질료(개체)와 형상(보편)이라는 상반된 두 요소르 이뤄져 있다고 보았다 (이 말은 즉 개체 안에 보편이 내재되어 있다는 말) 아토스에게 있어서 변화란 그저 가능태가 현실태로 바뀌는 것에 불과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형상의 구현이 목적이며 이 목적이 달성되면 상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가능태는 현실태가되고 이후에 다시 상위의 현실태가 되기 위한 가능태가 된다.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다보면 최종적으로 가능태가 되지 않는 순수한 현실태가 나오게 된다. 이런 순수형상 혹은 순수한 현실태는 변화하지 않고 운동하지 않는 존재이다. 바로 요기서 부동의 원동자라는 개념이 탄생한다. 부동의 원동자는 신(神)개념이다. 하지만 종교적 신은 아니고 이론적으로 따져서 등장한 이신론(理神論)적인 신이다. 바로 이게 개념적으로 이데아와 연결이 되므로 아토스도 결국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에 연결된다고 보는 시각이다. 아토스는 바로 이 부동의 원동자를 선배 철학자들이 불렀던 아르케(arche)로 보았고 우주의 궁극적인 원리로 이해했다.

 

 

 

윤리학

 

아테네학당 그림 소개에서 아토스가 손에 들고 있던 책이 바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란 책이다. 그는 이 저서에서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최고선을 다루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그리고 아토스가 말하는 행복이란 기쁘거나 즐거운 심리 상태를 가리키는게 아니다. 행복이란 인간의 영혼이 가장 탁월하게 활동하는 상태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덕은 선량함, 관대함, 정의로움과 같은 도덕적 자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자신에게 내재된 고유의 능력을 충분히 발현하며 살아가는 상태를 가리킨다. 마찬가지로 덕의 반대인 악덕도 역시 사악함과 같은 도덕적 자질이 아니라 자신에게 내재된 고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고 잠재워두는 상태로 여겼다.

 인간은 참된 행복에 도달하려면 가능태의 덕을 현실태로 바꾸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을 아토스는 다음의 네가지 방법으로 제시했다. 먼저 본성을 통해서, 그리고 학습을 통해서, 훈련을 통해서, 신의 호의를 통해서, 그리고 행운을 통해서이다. 다만 신의 호의나 행운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버리고 본성을 통해서도 소수의 몇몇 특별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 결국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학습과 훈련뿐이라고 봤다. 

 아토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을 실천적 덕과 이론적 덕으로 크게 나눴다. 실천적 덕은 중용(mesotes)을 지킬 때 가치를 지닌다라고 했는데 그가 말한 중용이란 극과 극 사이에서 최선의 방법을 탐구하여 적정한 정도를 선택하는 것이다. 전쟁에서 돌격할 때 돌격하고 후퇴할 때 후퇴해야 하는데 돌격만 하거나 후퇴만 하거나 이래서는 노답이라는 거다. 적당한 정도를 선택하는 것이 중용이다. 여기서 요청되는 것이 실천적 지혜, 프로네시스(phronesis)다. 프로네시스란 마땅한 중용의 길을 판단하는 능력이다. 아토스는 중용의 삶은 습관에서 온다고 말한다.

 이론적 덕이란 실천적 덕을 참다운 덕으로 만들 수 있는 덕이다. 이론적 덕은 지혜의 덕을 말한다. 지혜는 자유로운 덕이면서 동시에 최고의 덕으로 행복한 삶에 도달하게 해준다. 실천적인 덕이 중요하긴 해도 그것이 이론적 덕, 곧 지혜에 의해서 참다운 방향과 의미를 얻을 때 비로소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아토스는 행복한 삶이라 여겨지는 세 가지 삶의 형태를 검토한다. 세속적 쾌락에 바친 삶, 명성과 명예를 위한 삶, 관조(theoria.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봄)에 바친 삶이다. 이 중 아토스는 관조하는 삶이야 말로 최고의 선(善) 바로 행복이라고 주장한다. 아토스에 따르면 우리가 바쁜 것은 한가로움을 얻기 위해서이며, 전쟁을 하는 것은 평화를 얻기 위해서다.  관조는 이성의 활동이므로 지혜가 많을수록 더 잘 관조한다. 지혜로울수록 행복하다는 것이다. (소크형님의 주지주의가 살짝 보이는 대목이다) 하지만 관조하는 생활이 인간에게는 너무 높은 차원의 신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성을 따르는 생활은 인간적인 생활에 비하여 신적인 생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가능한 신적인 것에 다가서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먀 관조적인 삶은 전 생애에 걸쳐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미론

 

그는 미가 질서(taxis)와 크기(megethos)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질서란 결국 전체를 이루는 부분간의 조화로운 배열을 의미한다. 이 시각은 피타고라스에서 이어진 수적 비례이론을 계승한 결과이다. 그래서 아토스도 객관주의적 미학의 전통성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또한 크리에 대해서는 주관적인 것으로도 봤음을 알 수 있다. 너무 작은 생물은 그것에 대한 지각이 순간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너무 큰 생물은 한 번에 관찰할 수 없고 그 통일성과 전체성이 시계에 들어오지 않기에 아름다울 수가 없다라고 했다. 즉 아름다움이란 대상에 대한 선명한 지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는 경험주의적이었던 주곤적 요소를 언급하는 것이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제작학으로써 예술

 

아토스는 미보다 예술에 보다 더 관심을 기울였다. 예술이란 인간의 활동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예술은 동력인이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지 않고 제작자에게 있다고 보았다. 아토스는 학문의 종류를 이론학, 실천학, 제작학. 이렇게 3개로 분류했는데 이론학은 신학 수학 형이상학이고 실천학은 정치학 윤리학을 제작학에는 시학과 수사학을 포함시켰다. 인간의 활동을 탐구, 행위, 제작의 세 가지로 나누고 예술을 세 번째에 배치시킨 것이다. 하지만 예술을 그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테크네(techne : 의식적이고 지식에 근거를 둔 제작)에 기반을 두면서도 지적인 요인을 더욱 강조한 것은 아토스만의 고유한 시각이다. 아토스는 예술의 정서적 효과에도 주목을 했는데 예술을 통한 진리 인식을 인정하였다. 이는 플라톤은 예술은 진리에 이르기는 커녕 진리인식을 방해한다고 예술을 폄하한 것과는 상당한 대조를 보인다. 이는 단순한 예술관의 차이라기 보다는 진리관이 상이했기 때문에 발생한 견해 차이이다. 예술론은 실체를 개별자인 질료와 보편자인 형상의 결합이라고 본 그의 철학과 같이 간다. 아토스에 있어서 보편이란 현실의 구체적인 개별자 안에 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는 진리가 담겨져 있다. 예술은 현실을 모방함으로써 진리를 재현할 수 있다. 플라톤은 실체는 형상으로만 한정되는 것에 반해 극명히 대립된다. 플라톤은 예술가가 비합리적인 창조동인을 통해 현실을 뛰어 넘은 초월적 세계를 경험하거나 만들어야 한다 (이데아). 하지만 지금 계속 말했듯이 아토스는 이런 작업이 불필요하다. 

 

 

 

 

미메시스, 보편에 대한 모방

 

아토스는 영감 등 비합리적인 창조동인을 인정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테크네로 한정된 예술관을 견지했다 (하지만 지적요인도 강조한 점 참고하자) 그는 시학에서 미메시스 이론을 전개한다. 시학에서 모방 대상을 분류하는데 1번으로 사물의 과거나 현재의 상태, 2번으로 사물이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이러저러하다고 말하여지거나 생각되는 바의 상태 3번으로 사물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상태이다. 그는 3번을 가장 중요시 했는데 예술을 자연의 산물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생산력 또는 창조력을 재현해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어떤 이상적인 형상, 즉 보편을 그려내야 한다는 것으로 본 것이다. 병아리는 닭이 되고 강아지가 개가 되듯이, 상위 본질인 닭이나 개를 그려야 한다는 것. 병아리나 강아지에 내재되어 있는 본질이자 보편을 그린다는 것이다. 예술이 자연을 미메시스한다는 것은 이와 같이 자연이 개별자로부터 보편자를 실현해내듯이 예술도 지금 모델이 되고 있는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인 것을 그려낸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미메시스 이론이다. 그는 시학 9장에서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다" 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역사에는 미메시스가 개입되지 않지만 시는 미메시스에 의하기 때문에 시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라는 것이다. 역사는 그저 사실의 나열이자 개별적인 사건들의 기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