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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아카데미/미학, 철학사와 함께

15강.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미학. 예술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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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메시스, 보편에 대한 모방

예술제작과 관련해 아토스는 신적영감 등 비합리적인 창조동인을 대체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테크네(Techne)로 한정된 예술관을 견지했다. 아토스에게 있어서 예술이 진리를 묘사하는 방법은 바로 미메시스(Mimesis)였다. 아토스는 [자연학]에서 예술은 자연을 모방(Mimesis)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방에서는 예술가들이 실재를 있는 그대로 재현할 뿐만 아니라 더 아름답게 혹은 더 추하게 재현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시학]에서는 모방 대상을 분류하는데 1.사물의 과거나 현재의 상태 2.사물이 과거나 현재에 있어서 이러저러하다고 말하여지거나 생각되는 바의 상태 3.사물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상태. 이 중 가장 훌륭한 것을 3번이라고 봤다. 왜냐면 이상적 유형은 실재를 뛰어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현실에서 구속되고 있는 예측 가능한 미래를 그리는 것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은 자연을 미메시스한다. 예술은 자연을 모방한다는 것은 예술이 자연의 멋진 풍경이나 아름다운 자태 등의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사물들 시믕에 담겨져 있는 자연의 보편적 원리를 그려내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자연의 생산력 또는 자연의 창조력을 재현하라는 것이 그의 주장인 것이다. 자연의 모든 것은 자신의 본질, 형상을 구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앞선 시간에서 요약했듯 모든 자연은 현재의 가능태가 앞으로의 현실태가 되기 전의 상태에 있다. 즉, 닭이라는 종의 본질이 구현된 닭은 병아리에서 발전된 현실태(energeia)이다. 병아리에게는 닭의 형상이 내재되어 있는 셈이다. 바로 개별자안에 보편자가 들어가 있다는 뜻! 자연이 본질, 형상을 실현한다는 것은 개별적인 것 안에 들어있는 보편적인 것을 끄집어내 현실화 한다는 것과 같다. 예술은 병아리를 그리더라도 그 안에 깃들어 있고 앞으로 실현될 형상, 닭을 그려야 하는 것이다. 단, 닭이라도 병든 닭, 추한 닭, 생기 없는 닭 등등 종류가 많을텐데 가장 이상적인 형상의 건강하고 생명력 넘쳐 보이는 닭을 그려야 하는 것이다. 

 

 




이상주의 예술관

사물이 마땅히 그리 되어야 할 상태를 모방하라는 것은 아직은 현실에 없는 것을 택한다는 얘기가 된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낭만주의적 미학이 아니다. 병아리는 커서 닭이 되지, 독수리로 크지 않는다. 주어진 모델에 대한 예술적 가감과 미래에 대한 이상적 예견은 어디까지나 이상적 상태를 향한 방향으로만 용인됐지, 낭만주의처럼 작가의 자유로운 상상력에 의한 자유자재의 변형을 뜻한 것은 아니였다. 아토스의 예술이란 출발점은 모델의 개별자이지만 그것을 보고 그린 예술 작품에는 보편자가 있기 대문에 청출어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토스에게 있어서 예술 작품의 출발이 되는 모델의 존재란 사실 모방 대상이 아니고 참조 대상에 가깝다. 모방해야 할 것은 주어진 모델 자체가 아니라 그 모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이상적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플라톤과 다른 점이다. 플라톤의 경우 참다운 예술이 그려내야 할 궁극적 결과물은 이 세계 바깥, 저 초감각적 세계에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이데아인 것이고 아토스는 지금 모델이 현실에서 존재하고 있는 그 존재의 이상적 현실태를 그리는 것이므로 개별자안에 존재하고 있다. 진리의 소재지를 달리 보는 두 사람의 철학적 관점이 다른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데아라는 참진리를 미리 상정한 플라톤은 연연적 철학이고 초월적 세계를 설정하지 않고 현실에서 변화의 동인을 찾았던 아토스는 귀납적 철학이고 현세적 철학인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초월적 진리, 아토스는 현세적 진리로 구분할 수가 있다. 







탁월한 통찰력과 표현력의 소유자로서 예술가

아토스에게 있어서 예술가는 개개의 사태들로부터 그 안에 내재해 있는 하나의 보편적 진실을 잘 간파해내어야 한다. 예컨대 지진의 발생(개별)에서 재앙(보편)을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게 통찰력이다. 그리고 보편이 녹아들어 있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이나 속성 그리고 성격을 창출해내되, 그것이 허구라는 느낌을 주지 않고 가능한 그럴 듯하게, 있을 법하게 주조해 내야 한다. 이것은 표현력이다. 그리고 이 표현력이 바로 박진성(핍진성)이다. 박진성이란 가짜가 아니라 진짜란 말이며 진리에 육박한다라는 것이 원래의 의미이다.  아토스가 강조한 규칙의 습득도 결국 표현력에 봉사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아토스가 말하는 문학이다. 

 경험 세계의 개별자에서 보편자를 귀납해내어 그것을 다시 허구의 개별자로 환원시켜야 하는 작업인 아토스식 문학이란 여럿(多)의 세계에서 하나의(一) 세계로 이행하는 작업이다. 그리하여 문학은 개연성 있는 허구가 된다. 요약하자면 현실의 구체적이고 개별적 자료들에 흐르고 있는 보편을 잘 간파하는 통찰력이 필요하고 또 그렇게 뽑아낸 보편적 원리를 또 다른 새로운 플롯으로 구체화할 수 있는 표현력에서 탁월해야 한다는 것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아토스에게 있어 문학에서 비극의 생명은 플롯에 있다. 플롯은 필연성과 개연성에 의거하여 긴밀하고 통일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쉽게 말해 인과율에 따라 앞뒤가 맞아야 한다는 말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란 기계로부터 나온 신(神)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전개가 갑자기 느닷없이 기계적으로 나타나는 신에 의해서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뜻이다. 이렇게 아무런 논리적 연관성없이 작품의 외부 요소가 개입하여 해결하는 것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다. 극적 효과를 위해 극에서 갈등을 최고조로 올려 놓고 말도 안 되는 초자연적 요인이나 신의 개입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경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팔을 바다로 뻗으니까 갑자기 바다가 갈라져서 바닥이 드러나고 바닷물은 양 사이드에서 벽이되어 무사히 빠져나갔다는 이런 허무맹랑한 얘기가 아마 전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고 있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성경은 비유와 상징일 뿐.. 유사과학 논리를 들이밀며 그것을 텍스트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정신 좀 차렸으면 한다..

 

 




시의 생명으로서의 은유(Metaphor)

아토스는 통찰력과 표현력이라는 능력 외에도 은유 능력이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시학]에서 시의 생명은 은유이고 은유 구사능력은 천재의 징표라고도 얘기했다. 이런 주장을 보면 그에게 있어 예술은 완벽히 합리적인 창조동인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렇다고 천재가 전통적인 엔테오스(entheos. 잠시 신이 들어와있는 신비적 체험) 개념이 아니라 선천적이거나 내재된 인물 개념이라고 봐야 한다.

 은유란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결합되어 의미의 전이와 새로운 의미를 환기시키는 수사법의 한 방법이다. 은유라는 말 메타포는 언어의 기원이 Meta(~뒤의, ~이후, ~너머)와 Pherein(가져가다)이 합쳐진 메타페레인(Metapherein. 어떤 것의 자리에 다른 것을 옮겨놓다) 라는 것에서 유래했다. [시학]에서는 은유를 산 사물에게 다른 사물의 이름을 전용하는 것이라고 했고 [수사학]에서는 은유의 본질을 유비라고 주장했다. 은유가 한 사물을 다른 사물의 거울을 통하여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 즉 두 사물을 유사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에 은유는 다름에서 닮을을 찾아내는 능력. 즉, 유사성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은유는 동일성이 아니라 애매성 때문에 가능하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아토스는 은유를 일종의 수수께끼라고 규정했다. 은유는 그 뜻을 유추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다. 그래서 은유란 인식적 확장과 예술적 쾌감을 느끼게 해준다. 

 은유는 허구적인 것이며 시인의 개인적인 새로운 시각에 의해 가능해진다. 이런 시각은 상상력에서 온다. 상상력이란 ~처럼(as)이란 단어 속에 의미가 내포되듯 어떤 것에 대한 이미지를 ~처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유란 상상력의 산물이다. 탁월한 은유 구사자를 천재로 보내는 아토스의 시각은 눈여겨 봄직하다. 아직 예술과 창조적 상상력이 만나지 못했던 당시를 생각해 보면 아토스야 말로 시대를 앞서 나갔던 천재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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