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니체의 성장배경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아주 엄격한 청교도 목사인 아버지와 목사의 딸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서 대단히 종교적인 가문에서 자랐다. 5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이어 남동생도 사망한다.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과 이모들 사이에서 자랐기 때문에 니체의 철학에서 느껴지는 강인함, 남성다움에 대한 동경은 어린시절의 영향으로 봐지기도 한다.
니체는 시와 음악에도 재능이 있어 열살 무렵 작시를 했고 자작곡도 만드는 수준이었다. 학업성적은 우수했지만 수학은 열등했다. 많은 철학자들이 문학적 직관과 수학적 논리를 겸비했는데 니체는 문학적 직관이 특히나 뛰어난 철학자로 볼 수 있다. 철학은 그래서 문학+수학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문학적 직관이 뛰어난 그의 능력 때문인지 독일에서 니체는 문학자로 분류가 돼기도 했었다. 20세기에 들어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바람을 등에 업고 주로 프랑스 철학자들이 재조명하기 전까지 니체를 철학자보다는 문학가로 받아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접하면서 큰 변화를 맞게 되고 그때 부터 종교와 이성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 즈음 바그너를 만난 것 역시 이후 니체의 삶과 사상에 큰 영향을 준 만남이다.
니체의 철학은 생(生)철학이다. 생이란 인생, 삶, 생명을 말한다. 이것과 유사한 것이 실존철학이다. 인생과 삶, 지금의 생명을 중요시 한다는 것은 진리, 이성, 종교, 신, 절대라는 것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즉 헤겔의 절대정신인 사변적인 관념론을 부정한다는 말이다. 진리와 이성, 종교나 신 따위는 보편적이고 동일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즉 개념적인 것이며 정신적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철학부터 이어져 내려온 2천년 역사의 아폴론적인(정신적) 사유를 지금의 내 삶과 인생에 대한 디오니소스적(몸)철학으로 옮긴 것이 바로 니체의 사상이다. 여기서 부터 현대철학이 시작하는 것이다. 현대철학은 개별적이고 차이를 인정하며 감각적이고 몸을 말한다. 아폴론적인 것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의 이행, 바로 이것이 니체의 긍정이다. 즉, 아폴론적(종교, 철학) 긍정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 긍정이여야 하는 것이다.
니체는 주의주의다. 그 반대에 있는 것이 아는 것이 최고의 선인 주지주의. 즉,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는 아는 것이 최선이라고 한다면 주의주의는 알면 뭐하냐, 의지가 부족하여 실행하지 않는데. 이미 우리는 정답을 알고 있다. 실행에 옮기는 의지가 없어서 못 할 뿐이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 앎보다 의지가 먼저여야 한다는 주의주의다. 주의(의지)주의의 시작이 바로 쇼펜하우어다.
니체는 삶은 의지이다라고 말한다. 삶을 고통으로 본다는 자세가 깔려있다. 이는 쇼펜하우어에게서 영향을 받았는데 서양철학자 중에 두명의 붓다가 있는데 하나가 헤라클레이토스고 나머지 하나가 쇼펜하우어가 된다. 쇼펜하우어의 삶의 의지와 니체의 힘에 의지를 합치면 이것이 바로 존재의 의지가 된다. 니체는 이성의 소리나 하늘의 소리를 듣지 말고 몸의 소리나 대지의 소리를 들으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긍정이다. 쇼펜하우어가 고통의 원인인 의지로부터 벗어나야 행복하다고 한 반면 니체는 오히려 의지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끌어안아야 한다는 반대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것이 발전하면 아모르 파티가 되는 것이다.
아모르파티의 단계는 총 4단계이다. 먼저 고통과 의지를 직시하고, 그 다음 이것을 긍정하며, 그리고 이것을 사랑한다. 마지막으로 유희까지 상승시키는 것이다. 고통과 의지를 유희의 단계까지 상승시키면 이것이 위버멘쉬가 되는 것이다. 니체의 디오니소스는 역동적이다. 이 역동성이란 삶이 늘 끊임없이 바뀌는 어떤 것이라는 말이다.
니체에게 삶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그물로 건져 올리면 잘못된 것이다. 삶은 한없이 생성되고 육성되며 바뀌는데 사람들은 삶은 이러하다라고 건져 올린다. 그러나 니체에게 삶은 개념으로 건지거나 잡아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삶을 개념으로 고정시켜 버리면 그 순간부터 그것은 허구가 된다고 말한다. 삶은 흐르고 있기에 (becoming) 개념으로 잡아내면 (being)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Being은 고정불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개념적 사유에서만 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파르메니데스적인 사유이며 플라톤에게 가서는 이데아로 연결된다. 보편은 사유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Becoming은 변화생성하며 감각적인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이다. 이것이 몸철학으로 연결되며 유물론까지 연결이 된다. 니체는 현실은 육체와 감각의 세계요, 개별자의 영역이자 다양과 차이가 존재하는 세계다. 유물론적 입장인 것이다. 니체는 이성에 의한 개념적 사유보다 몸에 현상되는 사실을 더 참된 것으로 보고 이를 중시한다.
참고)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Being)
파르메니데스의 있는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것은, 쉽게 말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있는 것 뿐이다라는 것이다. 뒤집으면 생각되는 것은 존재한다는 얘기다. 없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사유와 존재는 같이 간다는 얘기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의 사유는 존재와 사유의 일치가 된다. 그런데 존재한다는 것은 ~어떠한 상태로 있다라는 판단이다. 이것은 어떠한 상태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This is flower라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This 가 flower의 상태로 계속 존재(is)해야 한다. 이는 꽃이 있다라는 사태는 꽃이라고 판단되고 있음과 같은 말이다. 즉 파르메니데스는 "이다"와 "있다"를 동일시 한 것이다. "있다"라는 외부적 사태를 "이다"라는 내부적 인간의 판단을 동일시 한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감각적 경험의 세계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순수 사유에 의해 파악되는 영원불변의 세계가 참된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상이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사상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고정불변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인간의 개념, 사유에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인간중심적인 사상이다. 바로 이 사상의 극단에 있는 것이 도가사상이다. 도가의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 즉, 도를 도라고 언어로 규정하는 순간 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름을 붙이지 마라. 즉,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도가사상의 무위적 자연중심적 사상이야 말로 인간중심적 사상의 극단에 있는 것이다.

3년만에 다시 수강한 철학아카데미... 너무나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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